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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삼청동(三淸洞)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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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3-05 20:52 조회2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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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삼청동(三淸洞)의 유래

 

우리나라 수도 서울 종로구에는 三淸洞이라는 동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도 웬만한 사람이면 삼청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청동이라는 동명이 붙게 된 내력이나 사연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 순흥안씨 자손으로써 삼청동에 대한 내력을 모른다면 선조에 대한 내력을 모른 것 과 다름이 없기에 그 내력을 소개 하고자합니다.

삼청동이라는 글자의 뜻대로 세 가지가 맑고 푸르다는 뜻인데 그 세 가지가 과연 무엇인가? 요즘으로 말하면 물이 맑고 하늘이 맑고 공기도 맑다는 뜻으로 생각 할 수도 있겠으나 삼청이란 뜻은 李朝政府官吏로써 民弊를 끼치지 않고 나라에서 받는 봉급으로 淸貧한 생활을 하는 淸廉潔白한 관리에게는 淸白吏라 하여 淸白吏賞을 주었다. 관리로서는 최고 최상의 영예이자, 영광이고 그 가문에도 영광이다. 그런데 그렇게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청백리상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 받으신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순흥안씨 贊成公 派祖 할아버님의 다섯째 아드님 되시는 인후(仁厚) 병판공(11)의 증손자 되시는 諱 玹(14) 문간공이시다. 공께서는 1501년에 태어나서 1521년에 약관20세에 문과에 급제하시고 벼슬길에 오르시어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이란 최고위 관직까지 역임하시면서 삼조삼선 청백리(三朝三選淸白吏) 을 받으신 바 있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前無後無한 역사적인 사실로써 할아버지께서 그 동리에 사시면서 청백리상을 세 번씩 받으셨다 하여 삼청동이라고 동명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로써 경신 보 3503쪽 휘 문휘공의 아우 되시는 휘 문간공 행적을 참조하였음.

순흥안씨와 명륜동(明倫洞)에 얽힌 사연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成均館)은 우리나라 大學의 뿌리이자 總 本山이다.

지금의 명륜동이라는 동명은1936년에 明倫學院이라는 유학원을 설립하고 명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그 전에는 관동(館洞)이라고도 불렀고 한편으로는 순흥안씨 노비촌(奴婢村)이라고도 불리워졌다 고 한다.

관동이라 함은 성균관이 있기 때문에 관자를 따라서 관동이라고 부른 것이며 順興安氏奴婢村이라고 별명이 붙여지게 된 것은 우리 순흥안씨 家門과 얽혀진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중과 역사적으로 맺어진 생생한 사실임을 밟혀주는 199154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서울 600년사에서 그것이 사실임을 고증할 수 있는 사실이 밟혀졌던 것이다.

명륜동이 순흥안씨 노비 촌이라 불리게 된 사연은 우리 안문의 名祖이신 文成公 晦軒 先祖께서 먼 옛날 高麗 中 末期인 고려 元宗 때 서기1300년대 후반 고려 王政腐敗할 때로 부패하고 임금은 한낱 우상에 불과할 뿐 모든 國政佛敎信者들이 左之右之하고 있었다. 雪上加霜으로 蒙古族侵略으로 전란이 끝 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으로 國家機關官員은 쥐꼬리만한 權力만 있어도 百姓收奪하여 괴롭히니 백성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기아선상을 헤매고 右往左往 彷徨하고 있었다. 위기에 처해 있는 이때에 하늘은 이 나라와 民族을 구하려고 우리 순흥안문의 名祖이신 회헌 문성공을 이 땅에 보내 주셨다. 문성공께서는(1243~1306)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학다리. 안터)에서 태어나셨으며 약관18세에 문과에 대과급제하시어 한림원 감찰어사로 출사하시었다. 여러 직책을 거치시고 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高麗國 벼슬로는 最高位職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도첨의 중찬 수문전태학사(都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에 오르셨다.

國家民族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선 道德政治를 해야 하고 도덕정치를 하기위해서는 人財養成함이 필요하며 인재를 양성하려면 이들을 가르치는 敎育機關財政的 뒷받침을 필요로 하였다.

당시 高麗 朝廷으로서는 이를 감당 할 만 한 財政이 없었던 것이다. 문성공께서는 中國에서 朱子學을 들여오시고 이를 우리 실정에 맞게 연구 창명하시고 인재 양성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宰相의 자리에 있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는 敎育理念으로 문성공께서는 살고 계시던 邸宅私財獻納하시고 집에서 부리고 있던 남녀노비(男女奴婢)를 모두 풀어주시었다. 인재양성과 교육은 계속이어오던 중 그 후 고려는 망하고 太祖朝鮮이란 國號開國하고 首都開城에서 서울로 遷都하며 成均館도 옮겨오게 되자 문성공의 크나큰 배려로 성균관 祭享을 도맡아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奴婢들의 後孫1000여명도 서울로 이사하여 明倫洞1.2.3가에 자리 잡고 살면서 이 때부터 순흥안씨노비촌 이라는 동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노비 집에서는 하숙하던 유생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높아지니 높은 관직을 가진 분이 많아졌고 왠만한 청탁은 안씨 노비를 통하여 해결하니 현직에 있는 말단 보다 노비가 해결하는 것이 빠르다는 소문으로 순흥안씨 노비가 되는것이 최고 인기를 누리는 일도 있었고 양반도 순흥안씨 노비에게는 함부로 하대하지 못하는 현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노비들은 그들의 상전이셨던 문성공 회헌 선생께서 자기들의 선조를 자유인으로 살 수 있도록 노비에서 속량하여 주신 은혜를 보답하는 뜻으로 성균관 경외에 숭보사(崇報祠)를 건립하고 봄에는 성균관에 모셔져 있는4610(四聖六賢十哲)을 제사 드릴 때와 가을에는 음력912일 회헌 선조님 기신제(忌辰祭)일에 제사를 봉행함으로써 회헌 선조의 후손 못지않은 정성으로 옛 상전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여건으로서는 노비를 속량하여 自由人으로 살게 한다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철저한 계급체제에서 100여명의 노비를 집단으로 해방하였다는 것은 革命에 가까운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고 오늘날의 만민 평등을 부르짖는 民主主義思想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서구 先進諸國의 민주주의가 200여년의 역사를 가졌다면 우리의 명조 회헌 선조께서는700여 년 전에 人間 尊重民本이란 民主思想을 주도적으로 실천하셨던 것이다.

위와 같은 先祖를 모시고 이 世上에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幸運인가? 우리 모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위대하신 조상께 욕되게 하는 불경을 저지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을 여기에 소개함은 순흥안씨의 후예 된 자로써 선조의 위대한 역사를 배우고 나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知慧를 찾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함입니다.

선조님들의 위대한 역사를 우리後孫들이라고 못 따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바른 생각, 바른 행동, 꾸준한 努力忍耐로써 진취적으로 실천하며 배우고 해 내겠다는 굳은 의지로써 조상님들께서 이루어 놓은 많은 업적을 이어 받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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