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의 역사

순흥 안씨는 1546년에 처음 간행한 병오보(丙午譜)와 관향유지사단기(貫鄕遺址祀壇記)에서 안자미(安子美)께서 1200년경(고려 神宗 熙宗朝)에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내시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으로 추봉(追封)되어 순흥군(順興君)에 봉군되시어 순흥 안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하였다.

 

시조께서는 11701180년경에 순흥 석교리에서 출생하신 것으로 추정되고 시조 이전의 상계(上系)는 알 수 없으나 시조 이래 후손들이 순흥(順興 興寧)에서 세거(世居)하였기에 관향(貫鄕)으로 된 것이다.

 

1654(효종 5)에 유적지인 순흥 석교리에 사단(祀壇)과 향려단비(鄕閭壇碑)를 세웠으며, 1988년 순흥 읍내리 비봉산(飛鳳山) 남쪽 기슭에 추원단(追遠壇)을 축조하여 성지화(聖地化)하였다.

 

시조 공이 아들 셋을 두셨는데 장남 영유(永儒 樞密院副使 上護軍)의 후손들을 1(), 차남 영린(永麟 神騎別將 密直副使)의 후손들을 2파로, 삼남 영화(永和 校書郞, 典理正郞)의 후손들을 3파로 구분한다.

 

관향지(貫鄕地) 순흥은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에 속해있는 지명이다. 고구려 때 급벌산군(及伐山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고, 940(고려 태조 23)에 흥주(興州)라 하였으며, 1275년 이후 고려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의 태()를 묻자 1348년 순흥부(順興府)로 승격되었고, 1413(태종 13)에는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457(丁丑 세조 3) 6~10월 금성대군(錦成大君)과 부사 이보흠(李甫欽)의 단종(端宗) 복위 밀모사건[丁丑之變]으로 8월에 순흥 도호부를 폐부(廢府)하여 단양과 봉화와 영천(영주)에 분할 귀속하게 되였다가 1683(숙종 9)에 폐부(廢府)된 지 226년 만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으며, 1895(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순흥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 영주군의 속면으로 격하되었고, 1980영주시 순흥면이 되었다.

 

단종 복위 밀모 사건에 참여한 안씨 일족이 70여 호였는데 모두 가안동 관군과 한양 철기군(鐵騎軍)에 의한 도륙으로 거의 멸족의 화를 당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멀리 숨어 리향(離鄕)하였으며 그 외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던지 죽계천이 피바다로 변하여 10여 리를 흘러 끝났다고 해서 그 동리(현제 동촌동)의 이름을 피 끝 마을이라 부르게 되어 그때의 참화를 증거한다.

 

순흥은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소백산(小白山)이 고을 북서쪽을 병풍같이 감싸고, 그 영산(靈山)에서 낙강수(落江水)로 발원해서 맑은 죽계천(竹溪川)이 순흥 한복판을 굽이쳐 흐르고 이 고을의 진산(鎭山)인 비봉산(飛鳳山)의 승경을 고려 말의 안축(安軸)은 죽계별곡(竹溪別曲)으로 마음껏 노래하며 자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