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 진 군

 

탐진군의 유래(耽津君派의 由來)

 

순흥안씨(順興安氏) 탐진군파(耽津君派)의 뿌리인 파조(派祖)는 문열공(文烈公) 휘 원린(諱 元璘 初諱는元崙)이시며 회헌 문성공 휘 유(晦軒 文成公 諱 裕)의 증손(曾孫)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 겸재 문숙공 휘 목(謙齊 文淑公 諱 牧)의 아들3형제중 제3자(子)이며1324년(高麗忠肅王11년)에 순흥안씨(順興安氏)7세(世)로 탄생(誕生)하시여 17세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정당문학 검교중추원사(政堂文學檢校中樞院事)에 이르고 탐진군(耽津君)으로봉해지고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다.

 

군호(君號)를 받음으로써 후손(後孫)이 크게 번성(繁盛)하여 호남지방(湖南地方)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묘소(墓所)는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대덕산(大德山)이라 하나 확실히 알 수 없고 배위(配位)는 군부인 전주최씨(郡夫人 全州崔氏) 이며 묘소는 창녕군 계성에 있다 하나 확인 할 수 없으니 참으로 애석(哀惜)하다.전주(全州) 삼천동 능안리에 현손(玄孫)병조판서(兵曹判書)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사종(士宗)의 산소(山所)위에 제단(祭壇)을 마련하여 세사(歲祀)를 모신다.

문열공(文烈公)께서 아들 3형제를 두셨으니

 

제1자(子) 우(祐)는 오성군(鰲城君)이고 고려공민왕(高麗恭愍王) 때 도원수(都元帥)로 홍건적(紅巾賊)을 대파하여 격퇴하므로 나라의 사직(社稷)을 회복(回復)하고 평온(平溫)을 되찾게 하신 추충절의정난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 중서평장정사오성(中書平章政事 鰲城君)이며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다.오성군(鰲城君)이 만호부(萬戶府)에 계실 때 누차에 걸쳐 홍건적(紅巾賊) 난(亂)을 평정(平定)하시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홍건적(紅巾賊)을 대파하여 국난(國難)을 극복(克復)하고 나라가 안정(安定)되니 백성(百姓)들이 그 공(功)을 치하(致賀)했다.경기도 마전 숭의전(京畿道 麻田 崇義殿)에 고려조(高麗朝)16공신(功臣)으로 배향(配享)되고 경북 경산시 조곡서원(早谷書院)에 주벽신위(主壁神位)로 배향(配享)하고 있다.오성군(鰲城君)의 아들은 현(顯)이고 손자(孫子)는 윤기(允基)이며 증손(曾孫)인 사종(士宗)은 병조판서 의정부좌찬성(兵曹判書 議政府左贊成)지내시고 현손(玄孫) 기(起)는 호가 평촌(平村)이고 평안도 안찰사(平安道 按察使)를 지내시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증직(贈職)받았다.현손(玄孫) 지(止)의 호(號)는 고은(皐隱)인데 공조판서 예문관대제학(工曹判書 藝文館大提學)으로 영중추원사(嶺中樞院事)이며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쓰시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시고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인데 조곡서원(早谷書院)에 고조(高祖)이신 문충공(文忠公) 우(祐)와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탐진군 문정공(조곡서원) 파조이시다.

 

제2자(子) 예(禮)는 상장군(上將軍)이며 공(公)은 1341년(辛巳 忠惠王2년) 송경(松京)에서 탄생(誕生)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고 벼슬이 광정대부 판밀직제학 겸 신호위상장군(匡靖大夫 判密直提學 兼 神虎衛上將軍)에 오르고 1361년(辛丑) 홍건적(紅巾賊) 난리 때 백공(伯公) 오성군 우(鰲城君 祐)께서 도원수(都元帥)로 이들을 토벌(討伐)하고 평정(平定)하여 지대(至大)한 공훈(功勳)을 세웠음에도 간신 김용(奸臣 金鏞)의 모해(謀害)를 입었다.공(公)은 이 때부터 벼슬을 단염(斷念) 하고 아우 헌납공(獻納公) 휘(諱) 복(福) 과 장단(長湍)의 대덕산(大德山) 밑에 은거(隱居)하였던 것이다. 조선조(朝鮮朝)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불응(不應)하고 은거하며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생애(生涯)를 마치시니 묘(墓)는 청원면 가현 황둔강상(靑元面 佳峴 黃芚江上)의 독산(獨山)인 을향(乙向) 둔덕에 있다. 후손(後孫)의 세거지(世居地)는 합천(陜川)이며. 후손(後孫)들이 대(代)를 이어 번영(繁榮)하다.

 

제3자(子)헌납공(헌납공) 도(堵 初諱는福)의 자(字)는 사백(士伯)이고 우헌납(右獻納)이며 공(공)의 생몰년대(生沒年代)는 미상(未詳)이나 1388년10월(高麗 禑王14년 戊辰)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셨다.

조선개국(朝鮮開國)으로 인한 역성혁명(易姓革命) 과정(過程)의 혼란(混亂)한시기에 공(公)의 형(兄) 상장군공(上將軍公) 휘 예(禮)는 위기에 처한 고려(高麗)충신(忠臣)들을 구하고자 자신(自身)의 안전을 돌보지 아니하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상황에서 모부인(母夫人)의 안전이 보장(保障)될 수 없음으로 공(公)은 모부인(母夫人)을 업고 장단(長湍)에서 천리(千里)길을 남행(南行)하여 창녕 영취산(昌寧 靈鷲山)아래 당포(唐浦)에 이르러 은거(隱居)하심에 세인(世人)들이 중국의 매복(梅福)에 비유하며 그를 출천(出天)의 효자(孝子)라 하였다. 후손의 세거지(世居地)는 의령(宜寧)이고 후손(後孫)들이 공(公)의 효성과 덕행(德行)을 되돌아보며 숭조목족(崇祖睦族)으로 대(代)를 이어가고 있다.

 

 

 

탐진군(耽津君)의 분관(分貫)

 

순흥 안씨 종파(宗派) 6세 문숙공(文淑公 謙齋 牧)의 아들 3형제(元崇.元衡.元璘)가 1341년(고려 忠惠王 2년) 문과(文科)에 동방(同榜) 등과(登科)하여 다음과 같이 각각 관작(官爵)을 받으시고 봉군(封君)됨으로 본래 순흥(順興)이 관향(貫鄕)인데 군호(君號)에 따라 제각기 관적(貫籍)을 달리하였다.

 

장남 원숭(元崇 1309년생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은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혜(文惠)인데 순흥 안씨 관적을 이어가고, 차남 원형(元衡 1318년생 政堂文學 門下侍中平章事)은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혜(文惠)인데 관적을 죽산(竹山)이라 하고, 삼남 원린(元璘 初諱는 元崙 1324년생 政堂文學 檢校中樞府事)은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열(文烈)인데 관적을 탐진(耽津)이라 하였으며 순흥 7세에서 각각 분적(分籍)하였다.

 

탐진(耽津)은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康津)의 옛 지명인데 1481년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강진은 백제 때의 동음현(冬音縣)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탐진현(耽津縣)으로 고쳤으며 1172년(고려 명종 2년) 오산(鰲山)으로 개칭 지금의 해남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1417년(태종 17년)에 강진현(康津縣)으로 개칭되었고 1895년(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탐진군으로 승격되어 나주부(羅州府)의 관할이 되었고, 1936년에 군 면 폐합으로 지금의 강진읍이 되었다.

강진은 탐진군(耽津君)께서 시거(始居)하신 고래유지(古來遺趾)로 안우(安祐) 등 후손들이 세거(世居)한 곳으로 선조들의 유서 깊은 고허지(古墟地)로서 지금의 강진군 성전면 대월리 지방에는 안첨사동(安僉士洞), 안정촌(安井村), 안샘골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며 성정면 송원리의 속칭 안지(安止) 낚시바위에 탐진군 문열공(文烈公 元璘)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탐진군이 순흥 안씨에서 분파(分派)된 증거(證據)

 

⊙ 1378년 이색(李穡) 『목은 문집(牧隱文集)』의 “하 죽계 안씨 삼자등과시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

⊙ 고려 충렬왕 때 민사평(閔思平) 『급암 시집(及菴詩集)』의 정당공(政堂公 謙齋) 세 아들의 등과(登科) 축시(祝詩),

⊙ 1662년 탐진군파 헌납공 10세 의(儀)의 『탐영실록(耽靈實錄)』

⊙ 죽산안씨(竹山安氏) 1801년 신유보(辛酉譜)의 “순흥군 문숙공 유사(順興君文淑公遺事)”

⊙ 1880년 탐진군 상장군공파 『탐진세고(耽津世稿)』의 세계도

⊙ 탐진군 상장군공파 계미보(癸未譜 1883년)의 보서(譜序)

⊙ 1921년 『회헌 실기(晦軒實記)』의 세계원류(世系源流)

⊙ 순흥안씨 무오보(戊午譜 1918년)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쓴 문숙공(文淑公 牧)의 묘갈명(墓碣銘)

⊙ 1925년 순원군(順原君 應昌)의 『백암문집(柏巖文集)』의 문성공(文成公 珦)과 문숙공(文淑公 牧)의 묘지문(墓誌文)

⊙ 1930년 탐진군 상장군공파 『뇌방지(磊坊誌)』의 세계 원류

⊙ 1962년 『순흥안씨 사효록(順興安氏思孝錄)』의 명조록(名祖錄)

⊙ 1971년 경남 마산 합포(合浦)의 문성공 회헌 안자 유적비(文成公晦軒安子遺蹟碑)

⊙ 1990년 순흥 읍내리의 순흥 안씨 추원단비(順興安氏追遠壇碑)

⊙ 순흥안씨 1918년 무오보(戊午譜)에 탐진군파 인명록(人名錄)과 오성군(鰲城君) 전기(傳記)의 등재(登載)

⊙ 1980년 경신보(庚申譜) 합보(合譜 順興 竹山 耽津)

⊙ 2012년 『순흥안씨대감(順興安氏大鑑)』의 탐진군파 사료(史料) 등 여러 문헌(文獻)에서 탐진군이 순흥 안씨 종파 7세 3형제임을 입증(立證)하고 있다.

 

또한 1912년(壬子)에 황해도 장단 대덕산의 문성공(文成公 珦)과 오공팔부인(五公八夫人) 묘소의 석물개수 대역사(大役事)에 헌성금(獻誠金)을 출연(出捐)하고 현지를 방문하여 수임(受任)을 수행하였으며, 2015년 11월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의 순흥 1파조이신 추밀공 영유(樞密公 永儒)의 분암(墳庵)인 영모암(永慕庵)의 중건(重建)에 헌금(獻金)을 헌납하고, 순흥 안씨 추원단(追遠壇)과 영모암 세사(歲祀)와 안자묘(安子廟) 기신제(忌辰祭) 등 숭조 행사(崇祖行事)에 탐진군파 종족(宗族)들이참여(參與)하여 순흥 안씨의 자손으로서 보본(報本)을 다하고 있다.

 

한편 영천 황보(永川皇甫) 시조 진주목사(晉州牧使) 황보 안(皇甫 安)의 배위가 순흥안씨 7세손 탐진군(耽津君) 원린(元璘)의 딸이며, 태원 안씨(太原安氏) 2세가 충장공(忠莊公) 안우(安祐)이고, 경주이씨 이달충(李達衷)의 둘째부인 장인이 충주 안씨(忠州安氏) 충렬공(忠烈公) 안우(安祐)이며, 1342년 밀성에 출사(出使)한 원 나라 어향사(御香使) 안우(安祐) 등의 기록이 있는데 이들을 순흥 안씨 오성군(鰲城君) 문충공(文忠公) 안우(安祐)와 동일인으로 유추(類推)하는 편견(偏見)이 있으나 탐진군파 안우(安祐)와는 시호(諡號)가 제각기 다르고 문헌(文獻)이없어 고증(考證)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