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순흥12세고은(皐隱) 지(止 1384~1464)는 사종(士宗)의 둘째아들로 매헌 권우(梅軒權遇)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414년(태종 14년) 알성친시(謁聖親試)에서 1등으로 등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고 1416년(태종 16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이 되시고 1434년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1440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오르시고 1441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1442년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시고 태조.정종.태종의 왕조실록을 편찬하셨고, 1444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어 1445년(세종 27년)에는 정인지(鄭麟趾).권제(權踶)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찬진(撰進)하였으며, 1446년(세종 28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북경에 가는 정조사(正朝使)가 되었으며,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1447년(세종 29년) 공조 판서(工曹判書), 1448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내신 문형(文衡)이다.
1449년(세종 31년) 세종의 어명(御命)으로 권제(權踶)와 더불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의 필삭 불공(筆削不公)으로 인한 고신 수탈(告身收奪)로 한때 호남 지방(湖南地方)을 유람(遊覽)하였다. 그때에 강진(康津)의 인접인 영암(靈巖)에 들러서 옛 친교인 참판(參判)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에게 준 시구(詩句)에 “아향시탐진(我鄕是耽津) 내 본시 고향이 탐진 이였다”는구절을 남겼으며, 문종 때 고신(告身)이 환급(還給)되고 이어서 단종(端宗 3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와 지경연사(知經筵事)로승임(陞任)되였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김제의 “안터” 향리에서 재야(在野)로 은거(隱居) 유거(留居)하면서 김제 향교(金堤鄕校)에 남긴 시(詩)에 “아본생사지(我本生斯地) 내 본듸 이곳에서 살아온 몸이니”는 구절을 남겼다.
1455년(세조 원년) 새로 즉위한 세조(世祖)가 공을 탐(耽)하여 근신(近臣)들의 종용(慫慂)으로 출조(出朝)하자 검교찬성(檢校贊成)으로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김제 “안터”의 향리로 내려와서 잠거(潛居)하셨으나 그 후로도 공의 입궐(入闕)을 권하는 소명사신(召命使臣)이 연이어 “안터” 본제를 찾으니 더 이상의 사양할 수가 없는지라 1461년(세조 7년)에 출조(出朝)하여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제수하고 어의(御衣) 일령(一領)을 내렸다.
1462년(세조 8년)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서 참지중추원사(參知中樞院事), 1463년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올랐으며 봉조하(奉朝賀)로 현작(顯爵)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시(詩)에 능했고 해서(楷書)를 잘 써서 세종의 명으로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쓴 당대의 명필이었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이고 묘소는 김제 평고(平皐 현 용지면 예촌리) 한절산(寒節山)에 합장이고 제각은 한절재(寒節齋)이다.
1794년(정조 18년)에 경북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 조곡서원(早谷書院)에 배향(配享)되고, 1914년에 경북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에 문정공(文靖公 皐隱 止)의 신도비를 세웠으며 1979년에는 김제시 용지면 구암리에 고은교(皐隱橋)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7세(순흥13세 건(健 1441~?)은 문정공(文靖公 皐隱 止)의 아들로 통훈대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고 배위는 숙인(淑人) 김해 김씨(金海金氏)인데 묘소가 실전되어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의 종산(宗山) 선영(先塋)에 설단(設壇)하고 제사(祭舍)는 영모재(永慕齋)이다.
7세(순흥13세 의(儀)는 문정공 지(止)의 둘째아들로 간성 군수(杆城郡守)이고 배위는 숙인(淑人) 풍덕 이씨(豊德李氏)와 후 배위가 평양 조씨(平壤趙氏)인데 묘소는 천안의 면천 함박산(咸博山)이라하나 실전이다. 14세 여(與)는 의(儀)의 아들로 부사직(副司直)이고 배위는 영인(令人) 동래 정씨(東萊鄭氏)인데 묘소는 실전되었고, 15세 인수(仁壽)는 의(儀)의 손자로 직장(直長)이고 배위는 영인(令人) 진주 강씨(晉州姜氏)인데 묘소는 오산면 장동이다. 후손들이 이어서 부사정(副司正) 교리(校理) 지평(持平) 진사(進士) 등 대를 이어 가문을 빛냈으며 서산군 음암면을 중심으로 천안(天安).인천(仁川).서울 등지에 세거(世居)한다.
8세(순흥14세 수명(受命)은 문정공(文靖公 皐隱 止)의 손자로 통훈대부 창령 현감(昌寧縣監)이고 배위는 숙인(淑人)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며 묘소는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의 종산(宗山) 분도등(芬道嶝)이다.
9세(순흥15세 인석(仁碩 1471~1507)은 문정공(文靖公 止)의 증손으로 통훈대부 경산 현령(慶山縣令)인대 조곡(早谷) 입향조(入鄕祖)이며 배위는 숙인(淑人) 월성 이씨(月城李氏)이고 묘소는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의 종산(宗山) 선영(先塋)이다. 공께서는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완(琓 일명 忠達)은 통진부사(通津府使)와 중직대부(中直大夫) 선공감역 판결사(繕工監役判決事)를 역임하고 1552년 강화에 시거(始居)하면서 용정리에 제승정(制勝亭)을 세웠으며 배위는 숙인(淑人) 면천 유씨(沔川兪氏)이고 묘소는 강화 통진 문수산(文殊山)인데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종산(宗山)에 이장(移葬)하고 재실은 숭모재(崇慕齋)이다. 완(琓)의 큰아들 규(規)는 조산대부(朝散大夫) 김포 현령(金浦縣令)을 지냈고 배위는 영인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며, 둘째아들 선(善)은 통훈대부 통진부사(通津府使)를 지내고 배위는 숙인(淑人)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며 묘소는 모두 냉정리 종산이다.
인석(仁碩)의 둘째아들 우(瑀 1519~1577)는 통훈대부 서사 봉사(筮仕奉事)이고 배위는 숙인(淑人) 상주 김씨(尙州金氏)이며 묘소는 조곡리의 종산(宗山) 선영(先塋)이다.
▶10세 (순흥16세)
우(瑀)
1519년1월3일 乙卯(中宗)生
1577년9월17일 丁丑(宣祖)卒
墓 早谷冠洞
配 淑人 尙州金氏
1555년8월16일 乙卯年 (明宗) 卒
墓 早谷后堂
通訓大夫行 奉仕
▶11세 (순흥17세)
경순(敬順)
1532년 壬辰生
1567년12월5일丁卯年 卒
墓 조곡상촌전록회동(早谷上村前麓回洞)
配 月城李氏
壬辰生
8월19일 忌日
主簿
▶12세 (순흥18세)
득(得)
1554년6월20일甲寅(明宗)生
1609년9월28일乙酉(光海)卒
墓 早谷冠洞
配 仁同玄氏
1555년乙卯生
1597년1월21일丁酉(宣祖)卒
▶13세 (순흥19세)
1. 國老 宗派
2. 邦老 冠洞派
3. 宅老 通德郞派
4. 宗老 栗山公派
5. 彭老 吉嶺派
6. 二老 後堂派
7. 忠老 藍浦公派
8. 繼老 從南派
13(순흥19세 충로(忠老 1609~1642)는 인석(仁碩)의 현손으로 1636년 병자호란 때 창의(倡義)하여 청병(淸兵)과 싸워 크게 부상하여 본진(本陣)으로 급구(急救)되어 목숨을 건졌으며 1641년에 통훈대부 난포 현감(藍浦縣監)으로 제수(除授)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배위는 숙인(淑人) 월성 김씨(月城金氏)이며 묘소는 조곡리 종산(宗山) 분도등(芬道嶝) 이다.
16세(순흥22세 몽상(夢祥 1606~1637)은 문정공의 10대손으로 강도영(江都營)의 천총(千摠)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이며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병(淸兵)과 싸워 장렬하게 순절(殉節)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추증되고 시호가 충익공(忠翼公)이며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의 충열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하동 정씨(河東鄭氏)이고 묘소는 강화 통진 문수산(文殊山)인데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종산(宗山)에 이장(移葬)하고 신도비(神道碑)를 수립(竪立)하였다.
17세(순흥23세 여송(如松 1747~1812)은 문정공의 11대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1783년(정조 7)에 경상도 유림 대표들과 예조에 증소(呈訴)하여 조곡 서원(早谷書院)을 창건하였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광주 이씨(廣州李氏)이고 묘소는 남산면 남곡리 이다.
20세(순흥26세 낙은(洛隱) 병희(炳喜 1854∼1939)은 이만구(李晩求) 선생에게 배워서 1901년에 의금부 도사가 되었고 1903년 통정대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배명 받았고 낙향하여 조의 유업계승에 일생을 바쳤다. 1912년(壬子)에 회헌 선조(文成公 安珦)와 5공 8부인의 묘비를 새로 단장하는 수역(隧役) 때 감역과 수전을 맡아 성공리에 마쳤으며 마전군 숭의전(麻田郡崇義殿)을 알묘하였다. 1900년(庚子) 봄에 재실 뒤로 사당을 옮겨 고은 선생을 모시고 춘추향(春秋香)을 받들었고 서원을 중수하고 1914년 10월에 고은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묘소는 청도군 매전면 임곡동 뒷산 기슭 사등에 있으며 배위는 숙부인 벽진 이씨(碧珍李氏)로 무덤은 합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