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기

조곡 서원 창건기(早谷書院創建記)


 

정조대왕 즉위 18년(1794) 갑인 여름에 조곡 서원을 창건하였다. 이는 고려조 추충절의 정난공신 중서평장사 오성군(推忠節義 靖亂功臣 中書平章事 鰲城君)과 그의 현손 조선조 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영집현전 지춘추관 성균관사 문정공 고은 선생(輔國崇祿大夫 領中樞院 俯事 領集賢殿 知春秋館 成均館事 文靖公 皐隱先生)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그의 후손 점(漸)과 여항(如恒) • 여송(如松)은 그 일을 주관하였고,여회(如悔).여초(如初)•여반(如盤)은 그 부역을 감독하였으며,제(濟)와 여석(如石)은 이를 윤색하였고,그 고을의 원님 정일태(鄭曰泰) 는 서원의 편액을 썼다. 또한 많은 안씨들이 나에게 그 서원의 전말을 기록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분수에 넘는 일이라고 여러 차례 이를 사양하였지만 마지 못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일어나 이 글을 쓰는 바이다.

 

아! 아름다운 일이다. 탐진 안씨는 오랜 집안인데 여기에서 또한 일신할 수 있는 시기를 맞이하였도다. 오성군은 고려 공민왕조에 도원수 (都元帥)로서 홍건적을 토벌하여 서울을 수복한 충성과 공로는 일대에 으뜸이었다. 이에 포은 정 선생은 제문(祭文)을 지어 그를 제사 위로하였고,조선조의 문종조에는 특별히 마전군(麻田郡)에 승의전(崇義殿)을 창건하여,함께 배향하기를 명하여 복지겸( 卜智謙)•신숭겸(申崇謙)•정포은(鄭圃隱: 정몽주) 등 많은 명신들과 함께 하였으며,문정공은 세종조에 대제학으로서 왕명을 받들어 용비어천가 125장을 찬술한 바 있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양전(兩銓)2)을 관장하여 보국(輔國)으로 승진되어 임금의 총애가 융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조 초에는 김제 평고 마을에 은거하니,문장과 덕학은 서사가(徐四佳 : 徐居正)와 김점필재(金佔畢齋 : 金宗直) 등 제현에 의하여 추대받기에 이르렀다.

 

두 분의 거룩한 업적이 그처름 탁월하여 우주를 버티어 주고, 해와 별같이 빛나니,참으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 말할 수 있다. 중세에 이르러 현령 공(縣令公)이 경산(慶山)에서 벼슬을 그만두고 이 고을에 안주하여 온 지 오래였으며,5.6대에 이르러 그들의 유풍이 점차 멀어지고 문헌을 모두 잃어 까마득하게 되어 비장한 감개가 일어나기에 이르렸다. 이는 마치 담자(郯子)가 상구(爽鳩)씨를 말한 고사3>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제사를 받들 장소마저 마련할 틈이 없었는데 무슨 행운이 있어,공론이 사라지지 않고,신령스러운 비밀은 삼백여 년 후에야 처음으로 서원이 창건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선인의 옛 유허지도 아니지만 그의 자손이 대대로 살아왔다는 인연으로 서원을 창건한 것이다. 그들의 자손은 이처럼 큰일에 힘이 부족하여 한 치도 도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재물을 모으고 재목을 다듬되 짧은 기간에 이를 모두 구비하였고,흙담이며,삽질이며, 새끼꼬고,도배하고,단청하는 일들을 각기 스스로 몸소 함으로써 일연 이 채 못되어 준공을 보게 된 것이다.

 

아! 그 어느 누가 사람의 자손이 아니랴마는 선조를 추모하고 높이 보답하는 성의는 안씨처럼 훌륭하였던 자손이 일찍이 있었던가? 손자로서 조부와 배향하여 한 사당에 함께 계시니,빛나고 빛나는 영령이여! 오르내리심에 기뻐할 듯 보이며,많고 많은 손들이 선조를 우러러 봄에 공경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씨의 효성은 이에 위대한 것이며,이 또한 유림에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 이후로부터 많은 손들은 그 당시 조상들의 고심과 열성을 잊지 않고 더욱 추모하여,이 집이 헐어지지 않도록 보존하고,여름엔 풍악을 올리고 봄에 글을 읽으면서 전래되어 온 유풍을 다시 떨친다면,장차 너희 후손이 창성하게 되어 충신과 현인의 덕택은 더욱 멀어질수록 더욱 그치지 않을 것이다. 불초한 이 사람이 돌이켜보면 이 글을 쓰 기에는 걸맞지 않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평소에 느낀 바 있기에,드디어 이를 기록하여 그들을 격려하는 바이다.

 

용집(龍集 : 歲次) 서기 1833년 계사(癸已) 늦은 봄에

벽진(碧珍) 이현(李錕)이 쓰고

서기 1986년(병인) 5월에 문열공 22대손 안대욱 번역하다

 

 

早谷書院刱建記

粵我 正祖大王卽阼之十八年閼逢維夏早谷書院建故麗朝推忠 節義定亂功臣中書平章事鰲城君曁厥玄孫我朝輔國崇祿大夫傾 中樞府事領集賢殿知春秋館成均館事文靖公皐隱先生妥靈之所 也後孫漸及如恒如松幹其事如晦如初如盤蔓役之濟及如石潤色之地倅鄭侯日泰扁額之旣又安氏諸益屬不侫以記其顚末屢辭僭越而不獲遂乃起而欽歎曰猗歟休哉耽津安氏舊矣而此又其一新 之期乎鰲城君當恭愍時以都元帥討紅巾賊收復京城以忠烈冠一世圃隱鄭先生爲文以祭之我文宗朝特命配食于麻田郡崇義殿與卜智謙申崇謙鄭圃隱諸名臣列焉文靖公當 世宗朝以提學承命撰 龍飛御天歌七十七章典文衡掌兩銓陞輔國寵渥甚隆光廟初退老金堤之平皐文章德學爲徐四佳金佔畢齋諸賢所推重焉則兩賢之偉蹟如彼卓犖撑宇宙而炳曰星儘所謂是祖是孫而逮至中世縣令公自慶山遞歸仍卜茲土累子孫五六世流風寢遠文籍蕩佚渺綿興慨有如郯子之說爽鳩故事而一區尸祝尚未遑也何幸公議不泯靈秘有待迄三百有餘年而始克刱建盖茲土非桑梓故墟而特因雲仍之世居而義起焉若甭孱孫事巨力薄曾無尺寸拮据而鳩財董木倉猝營辨至於版鉀絢索塗墼丹雘各自躬率而倡之閣閣噲噲不期年而告成噫夫非盡人之子孫歟而追先崇報之誠孰有如安氏者乎以孫配袓一廟並卓濯濯英靈怳若悅豫於陟降濟濟衿珮莫不欽聳於觀瞻安氏之孝於是爲大而亦豈非有光於斯文者乎繼茲以往諸益益追先父老之當日苦心血誠能不替堂搆夏紱春誦復振緖風則將

俾甭熾而昌而忠賢之澤愈遠而愈未艾也顧代斲匪其人而竊有所感於平曰者遂書此以勉之龍集癸巳暮春節後學碧珍李鋧記

 

 <註>


2) 양전(兩銓) : 조선 때 吏曹와 兵曹의 통칭. 일명 銓曹. 이조에서는 문관, 병조에 서는 무관을 銓衡한 데서 이 이름이 나왔다.

3) 爽鳩氏故事 : 爽鳩氏는 少臭氏를 말한다. 魯 昭公 17년 가을 郯子가 노 나라 조회에 참석하였는데 노 소공이 그에게 “少臭氏는 새의 이름으로 官名을 삼음은 무슨 까닭 이냐”고 묻자 담자는 “소취씨는 나의 선조이기에 나는 알고 있다. 예전에 우리의 선조 少臭氏가 왕위에 섰을 때 마침 봉황이 날아왔으므로 관명을 새 이름으로 붙이게 되었고 鳥師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천자가 벼슬을 잃으면 학문은 四夷에 있다”고 개탄한 데에서 비롯된 감개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