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 공

순흥안씨(順興安氏)는 고려 신종(神宗)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이며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으로 추봉(追封)된 휘() 자미(子美)가 시조(始祖)가 된다. 묘소가 순흥 소백산(小白山)에 있었다고 하나 표석(表石)이 없어 찾지 못하니 후손들 가슴에 사무치는 한()을 품게 한다. 옛 택지는 순흥성(順興城)남쪽 수리(數里)되는 평리촌(平里村) 진향(辰向)에 있었으니 회헌(晦軒) 선생께서 일찍이 벼루를 씻으시던 세연지(洗硯池)가 그 아래에 있다.

 

상호군공(上護軍公)3자를 생하니 장자는 휘() 영유(永儒)1201(辛酉神宗4)에 생하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호군(上護軍)으로 추봉되고 묘는 순흥 부석면(浮石面) 감곡리(甘谷里) 지장산(智藏山) 신좌(辛坐)이다.

1220(庚辰高宗7)에 휘 부()를 생하니 1244(甲辰)에 문과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판도판서(版圖判書)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으로 추봉되다.

 

1243(癸卯高宗30)에 태사공이 향()을 생하니 초휘(初諱)는 유()이라 선생이 젊어서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여 1260(庚申元宗1)에 나이 18세로 문과에 급제 1289(己丑)에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연경(燕京)에 유하여 주자서(朱子書)를 베끼고 공자(公子)와 주자(朱子)의 초상(肖像)을 본떠서 귀국하여 성리(性理)를 강구(講究)하고 정사(精舍)를 축조한 뒤 봉안(奉安)하고 조석으로 우러러 배알(拜謁) 경모(敬慕)함으로 해서 회헌(晦軒)이라 호()하다.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며 1319(乙未 忠肅王6)에 문묘(文廟)에 종사하다.

 

회헌 선생이 휘()우기(于器)를 생하니 호는 죽옥(竹屋)이요 문과에 올라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찬성사(檢校僉議贊成事) 겸 판전의시사(判典儀侍事)요 순평군(順平君)으로 봉해지고 시()는 문순(文順)이다. 문순공(文順公)2자를 생하니 장자는 휘() ()이니 호는 겸재(鼸齋)요 관은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이고 순흥군(順興君)으로 봉해지고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순흥군이 3자를 생하니 장자는 원숭(元崇)이고 문과에 올라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혜(文惠).

 

2자는 휘 원형(元衡)이니 문과에 올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보국문하시중 평장사(輔國門下侍中 平章事) 죽성군(竹城君)에 봉하니 죽성군 파조(派祖)가 된다.

 

3자는 휘() 원린(元璘)은 문과에 올라 정당문학 검교중추부사(政堂文學 檢校中樞府事)로 탐진군(耽津君)에 봉하니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고 탐진군(眈津君)파조(派祖)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