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산(仁山 : 옛 자인)의 남녘, 성잠(聖岑)의 아래에 조곡동(早谷洞)이 있으며, 조곡동에는 예전에 조곡 서원(早谷書院)이 있었다. 그곳은 안문충공 오성군(安文忠公 鱉城君) 우(祐)와 그의 현손 문정공 고은 선생 지(文靖公 皐隱先生 止)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祠宇)였었다. 삼가 고려사를 살펴보니, 현릉(玄陵 : 恭愍王) 임인년(1362)에 문충공은 도원수(都元帥)로서 내란을 평정하였고, 이어 변방의 적을 소탕하여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고, 온 나라가 온전히 살게 되었다. 또한 살펴보니, 성조(聖朝 : 朝鮮朝) 영릉(英陵 : 世宗) 을축년(1445)에 문정공은 권제(權踢)ㆍ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시 125장을 찬술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 이름하고 이를 조정의 제례악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 오성군의 위대한 공훈과 훌륭한 업적은 역사에 빛나고 그의 후손을 덮어 주었으며, 고은옹(皐隱翁)의 높은 재주와 통달한 식견은 성상을 보필하여 선비들의 법이 되었다. 이는 이미 예전 사람들의 서술에서 갖춰져 있으니 다시 들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늘에서 인재를 내리심은 예로부터 쉽지 않은 것인데 큰 공훈과 뛰어난 문장이 한 집안에 모두 모여 이처럼 빛나니, 마땅히 후생들의 추모하는 마음을 마지 않으며 한 사우에서 두 분을 함께 제향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서원의 훼철은 불행스럽게도 고종 무진년(1868)에 감행되었으며, 그 해가 또다시 되돌아 오는 데에도 제향을 받들지 못하고 선비들의 강학할 곳이 없으니, 그의 후손들은 더욱더 감개의 정이 간절하였다. 갑술년(1934) 춘분절기에 여론에 의하여 답답해 왔던 마음을 버리고 많은 사람이 모여 예전 창주 서원(滄州書院)의 의절을 모방하여 간략하게나마 제향을 봉행하였다. 이 해 임인년(1962) 2월 중정(中丁 : 중순의 丁日) 에 예전대로 사당 가운데 위패를 봉안하고 처음으로 성대한 제례를 봉행하였다.
나는 동주(洞主)로서 후손 춘곤(春坤)ㆍ동복(東福)ㆍ대욱(大旭) 등의 공의(公議)에 의하여 그 의의를 연역(演繹)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주기를 부탁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는 부덕(不德)하다 하여 이를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서원은 남당(南唐)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나라의 서원의 건립은 소수 서원(紹修書院)이 처음이다. 그윽히 생각해보니, 탐진 안씨(耽津安氏)는 회헌(晦軒)의 세대에서 나뉘어 나온 파이다. 참으로 영지(靈芝)란 훌륭한 뿌리가 있으며 동방 유교의 창명(倡明)은 회헌 선생에 의하여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참으로 유교를 붙잡아 세우는 것이며 유교의 흥망성쇠는 실로 국가의 흥망 성쇠와 관계되는 것이다. 지난날 유교가 융성한 시대에는 어진 유학자가 배출되어 문화가 높이 융성하였는데 근래에 들어 유학의 운이 쇠퇴됨으로써 인류는 금수로 탈바꿈하였으며, 세상에는 시와 예의를 익히지 않게 되었고, 고을에는 사양하는 풍속이 끊이게 되었으니 어찌 서원 건립에만 그칠 수 있겠는가?
서원 건립이란 성현을 높이고 보호하며 바른 학문을 강론하고 밝히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강학하고, 여기에서 제사를 올리며, 여기에서 옛 도학을 붙잡고, 여기에서 이단을 물리치는 것이며,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도를 찬란하게 다시 이곳에서 밝힌다면, 어찌 선왕께서 유학을 높이고 문화를 숭상하는 본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서원 건립의 본의를 서술하여 서원의 많은 군자들과 더불어 선민(先民)이 세교(世敎)를 붙잡아 주었던 점을 추모하여 함께 격려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하고자 하는 바이다
현묵섭제격(玄黙攝提格) : 서기 1962년(임인) 7월 중순에 후학(後學) 전주 이기철(李起轍)이 삼가 기록하고 서기 1986년(병인) 4월 문열공 22대손 대욱(大旭) 번역하다
|
||
早谷書院復享記
仁山之南聖岑之下有早谷洞洞中舊有早谷書院乃安文忠公鰲城君諱祐及其玄孫文靖公皐隱先生諱止妥靈之所也謹按麗史玄陵壬寅文忠公以都元帥平定內亂仍掃邊賊宗社再安舉國全活又按聖朝英陵乙丑文靖公與權踶鄭麟趾等撰詩一百二十五章名以龍飛御天歌以爲朝祭宴享之樂鳴呼鰲城君之嵬勳盛烈煒煌鼎呂而覆燾苗裔皐隱翁之高才達識黼黻皇猷而矜式章甫己有前人之述備矣無容更擧然天之降材從古不易多得豊功卓文幷萃於一家如是其烜炳宜其來生之追慕不歇而餟享疊祝於一祠也院宇之見撤不幸出於高宗戊辰令甲之回而俎豆旣廢衿紳無絃誦之地裔昆切瞿麥之感粵自甲戌之春分輿論齎咨含鬱協謀峻發倣古滄州儀節略行奠菜之儀是歲壬寅仲春之終丁仍舊奉安於廟中而始行麷蕡之禮忝不佞以爲洞主而後孫春坤東福大旭等以門命屬以演其義而記其實余以不德辭不獲而曰書院昉古南唐之白鹿而海東建院始於結修則紹修者晦軒夫子之畏壘也竊惟耽津氏分流於晦軒之世則儘知靈芝之有根而東方儒敎之倡明未必不由於晦軒而始矣是亶爲扶植儒敎之所而儒敎之盛衰實有關於國家之興亡也在昔儒敎盛時儒賢輩出文化丕興挽近儒運休衰人類化爲禽獸世無詩禮之習鄕絶揖讓之風則寧可已於建院耶建院者所以尊衛賢聖而講明正學也講學於斯尸祝於斯扶古道於斯闢異端於斯使先聖先師之道燦然復明於斯則是安知不爲先王崇儒術右文化之本意耶玆逑建院之本義乃與院中僉君子期欲以爲追先民扶世敎而共勗之資云甭
玄黙攝提格梧秋之仲浣後學全州李起轍謹記
|